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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풍년 방앗간 안희돈 대표


Q.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희돈이라합니다. 저는 용현동에서 60 년간 살고 있고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풍년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풍년 방앗간은 얼마나 된 곳인가요?

풍년 방앗간은 그러니까 68 년도 쯤 저희 아버지 때 부터 운영한 방앗간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하시는 일을 종종 도와 드리다가 아버님 연세도 드시고 손도 필요하게되어
80년대 쯤부터 제가 이어 받아하고 있습니다.

저희 방앗간은 떡만하는 곳이 아니라 제분도 같이하는 곳으로 예전에 인근의 냉면 집 등
제분을하러오는 손님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손님이 좀 줄지 만 그래도 인천에서 제분까지하는 몇 안되는
방앗간이라 아직도 찾아 주시는 진정이 계십니다.


예전에는 행사가있을 때 떡을 많이 맞습니다. 그때가 방앗간의 전성기 였죠.
예전에는 결혼식 때 뷔페가 생기기 전에 떡을 많이 했습니다. 또 가정의 대소사뿐 아니라
공장이나 항만 등 회의 준공식이나 큰 행사가있을 때 떡을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이름 만 대면 아는 회사에서 떡을 주문 했었는데
회장님이 공장이 번창하고 직원들이 안전하게 해달라고 절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떡시루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방앗간이다 보니 전기가 필요해서 우리가 이동 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 왔어요.
염전 바닥부터 돈 들여서 전기를 끌어 왔는데 그때만해도 우리가 처음 이었어요.
예전에 살게 힘들었을때니 그렇게 전선을 끌어온 걸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참 별별 일이 다 있었어요.



Q. 이동 네에 이사를 온 계기는 무었이고 그때 풍경은 어떠 했나요?

이북의 황해도에 살았는데 6.25 전쟁 때 1.4 후퇴시기에 피난을 내려오고있다. 그때 할아버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둘까지 6식구가 내려 왔던 걸로 기억 합니다. 아버지가 피난 내려 와서 한국 유리라고 판유리 만드는데서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시다가
방앗간을 처음 시작 한게 68년도 입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해도 이동네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원래 이쪽 방앗간 앞이 다 밭이었는데
그때 중국 사람이 밭주인이었던 걸로 기억 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중국 밭이라고 불렀는데 거름을 항상 많이 뿌렸어요.
그래서 항상 냄새가 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기 칼국수 집쪽에 개천이 거기 지나면 염전, 염전 서 벌판 염전에 저 끝에 낙섬이라는 섬이 있었죠.



Q. 낙섬은 어떤 곳 이었나요?

예전엔 거기서 엄청 놀았어요. 
염전 벌판이 놀이터 였고 낙섬으로 낚시나 조개주우러 동네 친구들 이랑 많이 나가서 놀았어요.
그런데 동네에서는 거기 가서 노는 걸 어른들이 안좋게 보셨는데 사고가 많았어요.
염전 저수지 쪽에서 해마다 익사 사고가 한번씩은 위험하고 가지 말라고들 하셨어요.

지금은 해안도로 만들면서 매립을해서 그 흔적만 남아 있는데
아마 70 년대까지만해도 섬이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Q.이 앞 수인선에 대한 추억은 어떤게 있으신가요?

방앗간 뒤편으로 수인선 철도가 있었는데 그 우리는 빽빽이 기차라 불렀던 증기기관차가 다녔어요. 그것도 협궤라고해서 바퀴 폭이 일반기차보다 좁은 기차 였어요.
그거 타면 뭐 수원, 소래, 송도, 안산, 고잔, 오이도
그쪽으로 사람이랑 짐을 실고 다녔습니다.
그 기차 유래가 저도 나중에 안 건데
일제가 인천에서는 소금, 거기에 화성 군에서 쌀을 운송하기 위해 기차라고합니다.


그리고 나서 협궤 열차 말고 일반 열차도 다녔는데 남부역이라고
여기에서 군인가는 입영 열차 출발을 했었어요.
지금 LH 아파트 자리가 예전 인천 공설 운동장었고
거기서 군인가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걸어서 역전까지 왔었습니다.


아마 50 ~ 60 년생 여기서 다 그 기차 타고 군대 갔을 거에요. 보통 오후 4 ~ 5 시쯤 기차가 떠나는데
그때까지 군인가는 사람들하고 가족들이 다 나와서 하루 종일 환송을하는데 울음 소리도 나고 그랬어요.

나중에 고속도로 뚫리고 나서는 남부역은화물 철도로 쓰였는데 동양 화학이라고 큰 회사가 저기 학익동에 있었어요. 그 회사에서 돌 나르고 기름 나르고하는데이 철도를 쓰고 그랬어요 아마 2000년대 초반까지 다녔던 것 같아요.


Q. 터미널에 기억이있으세요?

예전에 터미널이 없을 경우 기차를 타거나 아니면 제물포, 동인천을 지나가는 버스를 탔어요. 근데 한 1975년쯤인가 금아 산업이란 데서 터미널을 지어서 인천에서 다른 지역으로 갈때는 다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렸었죠. 그때가 아마 이동 네의 전성기가 아닐까해요. 예전에 그 터미널에 예식장도 있었는데 거기 엔 하객도 많아서 엄청 붐볐어요.


Q. 동네에 살면서 겪은 변화가 많을텐데 지금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원래 아무것도 없던 동네가 70 년대부터 많이 변하기 시작 했어요.
염 전문 닫고 나서 매립해서 저기 제일 제당 들어오고 도로가 만들어지고 터미널도 생기면서
그때가 아마 가장 크게 변했던시기가 아닐까합니다.

좋은 기억도 많은데 안 좋은 기억도 많았어요. 여기 방앗간 자리가 아주 많이 침수되는 지역
이라 비가 많이 올 때 밀물이 들어 오면 개천이 넘쳐서 여기까지 그냥 물이 들어 왔어요.

우리도 지금은 어깨 높이 정도에있는이 금이 예전 지붕 자리 였어요. 물이 자꾸 들어 오니까
집을 높이고 들어서 지금 높이까지 된거에요.
우리집은 그나마 집을 올려서 침수가 덜해서
예전에 물 차면 동네 분들이 우리집으로 피난 왔다가 물 빠지면 청소하러 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인가 길에 관도 새로 묻고하면서 물이 안 차는 것이 좋습니다.



Q. 근처가 토지 금고라고 불리던 데요.
여기가 동네 구성이 다른게
우리 방앗간있는 동네는 6.25 때부터 조성 된 오래된 동네 였고
저쪽 동네는 한 70 ~ 80 년대부터 토지금고가 생기며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긴 동네인데 그래서 여기랑은 동네 구성이 좀 달라요.
그리고 우리는 몇 년전까지만해도 숭의동 이었어요.
우리는 동네에서 오래 사신 분들이 많았는데 주로 인천항에서 일 하시던 분들이 많았어요.
근데 이제 평택항 생기고 일이 없어지니까 이사도 많이 가시고
연세 들어서 돌아 가시고 그러면서 많이 떠나고 있어요.


Q. 용현 2 동에서 계속 사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전부터 교통이 좋았어요. 지금도 지하철이 있고 있고 저기 배 타러가는 연안 부두도 가깝고 공항도 가깝고 좋아요.
그리고 여기 시민이 참 온순 해요. 물이 그렇게 차고 동네에 문제가 생겨도 누구 하나 항의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걸 못 봤어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사람들이랑 살다 보니 계속 동네에서 살고 있어요.



Q. 앞으로도 이동 네에서 계속 살고 싶으세요?

방앗간을해서 자식들 먹이고 키웠으니 잘살았다 생각 해요. 방앗간에 오는 동네 사람들이 우리 애들 얼굴을 다 알고 잘 챙겨주세요.
한번은 막내 딸이 어렸을 때 터미널까지 혼자 놀러 나갔다가 헤매는걸 보고 동네사람들이
데려와 주신 적도 있어요.
방앗간 애들이라고 동네에서는 다들 알아봐 주시고 한번 더 살펴보셨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붙들고있는 건 미련 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방앗간이 점점 사양길이라
내 나이에 맞게 점점 일이 줄고 있어요.
우리는 떡을해도 소매는 안하고 다 주문 이니까 가끔씩 주문 해주시는
단골들하고 또 철되면 고추 빻으러 오시는 분들 이렇게 소소하게 해 나가고 있어요.


서울 어디를 보니 오래된 방앗간을 보존 해 주는데도 있더라구요. 우리는 예전 제분 기계부터 됫박 이런걸 안 버리고 잘 갖고 있어요. 뭐 개발이 되는게 어쩔 수없는 일이라면야 어쩔 수 없지만 계속 애정하던 동네가 사라지는 것도
서운한 일이라 앞으로도 잘 보존 되었으면하는 마음도 있어요.

뭐 혼자서는 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많이 관심도 갖고 도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더 갤러리카페 쉼 김영분 목사


Q.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애 순복음 교회 김영분 목사입니다. 1978 년 정도에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원래 살던 곳은 용현 시장 쪽이었는데
이사를 할 때가되어서 알아 보던 중 집을 6 채를 지으면서 분양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분양을 받아 이사를 오게 됐어요.
처음에는 시장 근처에 살아서 활발한 분위기가 익숙한데
이 동네는 한적한 분위기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아요.


동네는 한적한 데 교통이나 편의 시설은 좋았어요. 서울에 가기도 좋고
숭의 로터리쪽에 적십자 병원, 남인천 세무서 등 관공서가 근처에 많았어요.



Q. 어떤 기억이있으세요?

수인선은 기억에 하루에 몇번씩 석탄을 실은 기차가 다던 던 기억이나요. 기차가 다니던 길이 도로랑 닿아 있었는데 기차가 한 번지나 갈 때마다
교통이 마비가 돼서 막 5 분, 10 분 정도 석탄을 싣고 긴 기차가 지나가니까
그런 부분이 불편 하긴 했었 었습니다.

수인선 철도 근처에 가면 그렇게 실고 온 시커먼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거든요.
그걸로 연탄도 찍었던 걸로 기억 해요.


또 농산물도 많이 올라 오면서 저쪽에 곡물 시장이라고 도매로 고추같은걸 팔고 참기름 짜고 들기름 짜고,
깨 그런 것들, 장날은 아닌데 장이서는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많이와서 장사들 하시고 구매해서 가시고 그랬 었어요.



Q. 동네에 대한 기억은 어떤게있으세요?

비만 오면 물난리가 났어요.그래서 교회 예배 마치고 성도들 집에 가서 물을 푸고 그때 둥둥 떠 있던 바가지가 아직도 기억이나요.
바다 근처라 만조 때 물이 차는데 우리 아들 초등학교 2학년 때 개천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개천에 물이 불어서 못 나와 버린 거에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구해줘 서 다행이 있었는데 아찔했었던 기억이나요.



Q. 동네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다니나요?

교회 다 보니 전도와 신앙 생활을 주로했는데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아이들을 돌보기 어느 어려운 집들이 많았어서 혼자있다 다치는 아이들도있었어요.
그래서 축구단을 만들었어요.
이 아이들 해요이 정말 열심히해서 다른 교회랑 축구 대회를해도
거의 이겼 던 걸로 기억.
그때 아이들도 성장했지만 저희도 같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Q.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진달래 아파트라고 오래된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지금이야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그당시에는 엄청 신식 아파트로 인기가 많았어요.
아파트가 들어 서니 동네 분위기도 더 활기 차 졌던 걸로 기억 해요.
아파트를 부러워하는 시각도 있었는데 거기 만해도 주택이 일반적이라
저 같은 경우는 마당이 있는 주택이 더 좋았어요.
아파트가 부러운 건 눈 오늘날 마당의 눈을 치우지 않아도 되는 거 였어요. 지금은 다른 아파트 단지도 많이 들어서고 아파트를 더 선호하지만 예전에는 그랬던 기억이나요.
저도 지금은 그 주택을 팔고 지금 이 자리에 3 층 건물을 지어서 교회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요.



Q. 목사님에게 용현 2 동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오래 살았으니 고향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는 지역에서 동네 사람들 이랑 같이 이야기 나누며 늙어 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 지역에 외로운 분들이 많으신데 저도 이제 나이가있어 은퇴를 앞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필요하고 무얼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동네의 외로운 분들과 함께 소통하고 싶어
1 층에 카페를 열었어요. 저도 그냥
외롭게 있고 싶지 않고 또 동네의 외로운 분들이 자주 카페를 찾아주세요.
가족 내의 갈등, 일하면서의 힘든 시간이 카페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있는 시간이 소중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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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916-8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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