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갤러리 카페 쉼 김영분 목사




Q.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애순복음교회 김영분목사입니다. 1978년 정도에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원래 살던 곳은 용현시장 쪽이었는데 이사를 할때가 되어서 알아보던 중 집을 6채를 지으면서 분양한다고 그래서 신청을 해서 분양이되면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처음에는 시장 근처에 살아서 활발한 분위기가 익숙했는데 이동네는 한적한 분위기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중의 하나를 저희가 분양받아서 들어오게 됐죠.

동네는 한적한데 교통이나 편의시설은 좋았어요. 서울에가기도 좋고 숭의로터리쪽에 적십자병원, 남인천세무서 등 관공서가 근처에 많았어요.


Q. 수인선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수인선은 기억에 하루에 몇 번씩 기차, 석탄 실은 기차가 다녔던 기억이 나요. 기차가 다니던 길이 도로랑 걸려있었는데 기차가 한 번 지나 갈 때마다 교통이 마비가 돼서 막 5분 정도, 10분 정도 석탄을 싣고 긴 기차가 지나가니까 그런 부분이 불편하긴 했었죠.

수인선 철도 근처에 가면 그렇게 실고 온 큰 석탄이 시커먼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거든요. 그걸로 연탄도 찍었던 걸로 기억해요.

또 농산물도 많이 올라오면서 저쪽에 곡물시장이라고 고추 같은 거 농산물들 도매로 하면서 참기름 짜고 들기름 짜고, 깨 그런 것들, 고추 말린 거 팔고 그런 거로는 좀 먼 데서도 거기가 진짜라 그러면서 장날 서는 것처럼, 장날은 아닌데 그런 기분으로 오셔서 많이들 오셔서 장사들 하시고 구매해서 가시고 그랬었어요.


Q. 동네에 대한 기억은 어떤게 있으세요?

비만 오면 침수가 되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교회 예배 마치고 성도들 집에가서 물을 푸고 그때 둥둥떠있던 바가지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바다 근처라 만조때 물이 차는데 우리아들 초등학교 2학년때 개천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개천에 물이 불어서 못 나와 버린거에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구해줘서 다행이었는데 아찔 했었던 기억이 나요.


Q. 동네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교회다 보니 전도와 신앙생활을 주로 했는데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운 집들이 많았어서 혼자 있다 다치는 아이들도 있어서 어느날은 그 아이들과 같이 축구단을 만들었어요. 이 아이들이 정말 열심히 해서 다른 교회랑 축구대회를 해도 거의 이겼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아이들도 성장했지만 저희도 같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Q .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

진달래 아파트라고 오래된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지금이야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그당시에는 엄청 신식 아파트로 인기가 많았어요. 아파트가 들어서니 동네 분위기도 더 활기차졌던 걸로 기억해요. 아파트를 부러워 하는 시각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주택이 일반적이라 저 같은 경우는 마당이 있는 주택이 더 좋았어요. 아파트가 부러운건 눈오늘날 마당의 눈을 치우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지금은 다른 아파트 단지도 많이 들어서고 아파트를 더 선호하지만 예전에는 그랬던 기억이 나요. 저도 지금은 그 주택을 팔고 지금 이자리에 3층 건물을 지어서 교회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요.


Q. 목사님에게 용현2동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

오래 살았으니 고향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는 지역에서 동네사람들이랑 같이 이야기 하누며 늙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 지역에 외로운 분들이 많으신데 저도 이제 나이가 있어 은퇴를 앞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은퇴하고 무얼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동네의 외로운 분들과 함께 소통하고 싶어 1층에 카페를 열었어요. 저도 은퇴하고 그냥 외롭게 있고 싶지 않고 또 동네의 외로운 분들이 자주 카페를 찾아주세요. 가족내의 갈등, 일하면서의 힘든 것들을 카페에서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한 것 같아요.


풍년 방앗간 안희돈 대표




Q.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희돈이라 합니다. 저는 용현동에서 60년간 살고 있고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풍년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풍년방앗간은 얼마나 된 곳인가요?

풍년방앗간은 그러니까 1968년도쯤 저희 아버지때 시작한 방앗간입니다. 어린시절 아버님 하시는 일을 종종 도와드리다가 아버님 연세도 드시고 손도 필요하게 되어 1980년대쯤부터 제가 이어 받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방앗간은 떡만 하는 곳이 아니라 제분도 같이 하는 곳으로 예전에 인근의 냉면집에서도 제분을 하러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손님이 좀 줄었지만 그래도 인천에서 제분까지 하는 몇안되는 방앗간이라 아직도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계십니다.

예전에는 행사가 있을 때 떡을 많이 맞췄습니다. 그때가 방앗간의 전성기였죠. 예전에는 결혼식때 뷔페가 생기기 전에 떡을 많이 맞췄었습니다. 또 가정의 대소사뿐 아니라 공장이나 항만 등에서도 준공식이나 큰 행사가 있을때 떡을 많이 맞췄습니다. 한번은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에서 떡을 주문했었는데 회장님이 공장이 번창하고 안전하게 해달라고 절을 했던 떡시루를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방앗간이다 보니 전기가 필요했는데 우리가 이동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왔어요. 염전바닥부터 돈들여서 전기를 끌어왔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예전에 살기 힘들때니 그렇게 전선을 끌어온걸 끊어서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고 참 별별일이 다 있었어요.


Q 이동네에 이사를 온계기는 무었이고 그때 풍경은 어떠했나요?

저희는 할아버지대에는 원래 이북의 황해도에 살았는데 6.25전쟁 때 1.4후퇴 시기에 피난을 내려왔습니다. 그때 할어버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둘 까지 6식구가 내려왔던걸로 기억합

아버지가 피난내려와서 한국유리라고 판유리 만드는데서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방앗간을 처음시작한게 68년도 였습니다.

처음 이사왔을 때만 해도 이동네는 앞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원래 이쪽 방앗간 앞이 다 밭이었는데 그때 중국사람이 밭주인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중국 밭이라고 불렀는데 거름을 항상 많이 뿌렸어요. 그래서 항상 냄새가 났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기 칼국수집 쪽에 개천이 있었고 그 지나면 염전, 염전 지나서 벌판 염전에 저 끝에 낙섬이라는 섬이 있었죠.


Q. 낙섬은 어떤 곳이었나요?

예전엔 거기서 엄청 놀았어요. 저희는 염전 벌판이 놀이터였고 그다음에 낙섬이었는데 그쪽으로 바다낚시 엄청 다니고 조개 잡으러 다니고 어릴 땐 동네 친구들이랑 많이 나가서 놀았어요.

그런데 동네에서는 거기가서 노는걸 어른들이 안좋게 보셨는데 사고가 많았어요. 염전저수지쪽에서 해마다 익사사고가 한번씩은 있어서 위험하다고 가지말라고들 하셨어요.

지금은 해안도로 만들면서 매립을 해서 그 형태만 남아 있는데 아마 70년대 까지만 해도 섬이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Q. 이 앞 수인선에 대한 추억은 어떤게 있으신가요?

방앗간 뒤편으로 수인선 철도가 있었는데 그 우리는 빽빽이 기차라 불렀는데 증기기관차가 다녔었어요. 그것도 협궤라고해서 바퀴 폭이 좁은 작은 기차였어요.

그거 타면 뭐 수원 가는 사람 타고 가고 소래, 송도, 지금 안산 그쪽 고잔, 오이도 그쪽으로 사람이랑 짐을 실고 다녔었습니다. 그 기차 유래가 저도 나중에 안 건데 일제가 인천에서는 소금, 그다음에 화성군에서 쌀을 운송하기 위해 만든 기차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협궤열차 말고 일반 열차도 다녔는데 남부역이라고 여기에서 군인가는 입영열차가 출발을 했었어요. 지금 LH 아파트 자리가 예전 인천공설운동장이었는데 거기서 군인 가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걸어서 역전까지 왔었습니다. 아마 50~60년생까지는 여기서 다 그 기차 타고 군대 갔을 거에요. 보통 오후 4~5시쯤 기차가 떠나는데 그때까지 군인가는 사람들하고 가족들이 다 나와서 하루종일 환송을 하는데 울음소리도 나고 그랬어요.

나중에 고속도로 뚫리고 나서는 남부역은 화물 철도로 쓰였는데 동양화학이라고 큰 회사가 저기 학익동에 있었어요. 그 회사에서 돌나르고 기름나르고 하는데 이 철도를 쓰고 그랬어요 아마 2000년대 초반까지 다녔던 것 같아요.


Q. 터미널에 대해서는 기억이 있으세요?

예전에 터미널이 없을 때는 기차를 타거나 아니면 제물포, 동인천을 지나가는 버스를 탔었어요. 근데 한 1975년쯤인가 금아산업이란데서 터미널을 지어서 인천에서 다른 지역으로 갈때는 다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렸었죠. 그때가 아마 이동네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어요.

예전에 그 터미널에 예식장도 있었는데 거기엔 하객도 많아서 엄청 붐볐어요.


Q. 동네에 살면서 겪으신 변화가 많으실텐데 지금이랑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원래 아무것도 없던 동네가 70년대부터 많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염전문닫고 나서 매립해서 저기 제일제당 들어오고 도로가 만들어지고 터미널도 생기면서 그때가 아마 가장 크게 변했던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기억도 많은데 힘든 것도 많았어요. 여기 방앗간 자리가 아주 매년 침수되는 지역이었는데 비가 많이 올 때 밀물이 들어오면 개천이 넘쳐서 여기까지 그냥 물이 들어왔어요.

우리도 지금은 어깨높이 정도에 있는 이 금이 예전 지붕자리였어요. 물이 자꾸 들어오니까 집을 높이고 높여서 지금 높이까지 된거에요. 우리집은 그나마 집을 올려서 피해가 덜해서 예전에 물차면 동네분들이 우리집으로 피난왔다가 물 빠지면 청소하러 가고 그랬어요. 매년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인가 길에 관도 새로 묻고 하면서 물이 안 차는 것 같아요.


Q 근처가 토지금고라고 불리던데요.

여기가 동네 구성이 다른게 우리 방앗간 있는 동네는 6.25때부터 집이 생기기 시작한 오래된 동네였고 저쪽 동네는 저 동네는 한 1970~80년대부터 토지금고가 생기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긴 동네인데 그래서 토지금고라고 불리는 동네로 우리랑은 동네 구성이 좀 달라요. 그리고 우리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숭의동이었어요.

우리는 동네에서 오래 사신 분들이 많았는데 주로 인천항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많았어요. 근데 이제 평택항 생기고 일이 없어지니까 이사도 많이 가시고 사시다가 연세들어서 돌아가시고 그러면서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Q. 용현2동에서 계속 사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전부터 교통이 좋았어요. 지금도 지하철이 있고 고속도로 있고 저기 배타러 가는 연안부두도 가깝고 공항도 가깝고 교통편이 좋은 게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기 주민들이 참 온순해요. 물이 그렇게 차고 동네에 피해가 생겨도 누구하나 항의하거나 소란을 피우는걸 못봤어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사람들이랑 살다보니 계속 동네에서 살고 있어요.


Q. 앞으로도 이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으세요?  

방앗간을 해서 자식들 먹이고 키웠으니 잘했다고 생각해요. 방앗간에 오는 동네사람들이 우리애들 얼굴을 알고 있어서 한번은 막내딸이 어렸을때 터미널까지 혼자 놀러 나갔다가 데리고 와주신 적도 있어요. 방앗간 애들이라고 동네에서는 다들 알아봐주시고 한번 더 살펴주셨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건 미련일 수도 있는데 이제는 방앗간이 점점 사양길이라 내 나이에 맞게 점점 일이 줄어들어요. 우리는 떡을 해도 소매는 안하고 다 주문이니까 가끔씩 주문해주시는 단골들하고 또 철대면 고추빻으러 오시는 분들 이렇게 소소하게 해나가고 있어요.

서울 어디를 보니 오래된 방앗간을 보존해 주는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예전 제분기계부터 됫박 이런걸 안버리고 잘 갖고 있어요. 뭐 개발이 되는게 어쩔 수 없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계속 애정하던 동네가 사라지는것도 서운한 일이라 앞으로도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뭐 혼자서는 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많이 관심도 갖고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건일 선생님 (금아주택 거주 )




Q.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건일 입니다. 용현동에 이사온 건 1969년도 8월 30일 날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는 여긴가 허허벌판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집만 몇 동 있었는데 금아산업에서 견본주택으로 13동을 지었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3번째로 들어온 집이에요.


Q.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현판이 있던데요.

저희 할아버님이 백범김구선생님이랑 독립운동을 하셨었어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일을 하시다가 발각 돼서 일제에 잡혀서 15년 선고받고 7년 만에 나오셨어요. 원래 할아버님은 내세우는 걸 안 좋아하셨는데 나중에 나라에서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조사할 때 그때 신청을 하셔서 지금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죠. 그게 아마 서훈 중에서는 3번째로 높은 서훈인 거로 기억해요.


Q.용현2동으로 오신 이유가 있으세요?

이북에서 살다가 전쟁 때 피난 내려와 인천에 자리를 잡았어요. 교회에 사택에서 살았었는데 사택에서 오래 살다가 이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이쪽으로 서둘러 집을 구해 왔어요.


Q.당시 용현2동은 어떤 동네였나요?

지금이야 수인역도 생기고 경인고속도로도 있어 교통이 괜찮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교통이 엄청 불편했을 때에요. 동네 밖으로 나가려면 개천을 지나서 저 숭의동 로터리까지 가야 버스를 타거나 할 수 있었어요. 터미널 생기고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인구가 이쪽으로 유입돼서 지금처럼 번성한 거로 기억해요.


Q.낙섬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지금 그 낙섬 사거리 쪽 지금은 섬이 아닌데 매립 전에는 진짜 섬이었어요. 염전에 쓸 물 가둬놓는 제방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놀 거리가 없으니 거기 가서 수영 배우고 거기 가서 짱뚱어 기어 다니는 거 보고, 그 당시에는 짱뚱어를 잡으면 기름 냄새가 났었어요. 저 송도 쪽에 기름 탱크가 있어서 거기서 흘러내려 온 물이 갯벌로 흘러가서 그랬던 거로 알아요.

겨울에 엄청 추울 때 그때는 낙섬 제방 쪽이 얼어요. 얼면 위가 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얼었던 층이 쓱 꺼지면서 경사가 생겨요. 거기로 스케이트를 겨울에 타러 다녔어요. 그 경사를 타고 쓱 올라오고 내려가면서 위험하게 놀았었어요.


Q.수인선에 대한 기억은 있으세요?

수인선 협궤열차를 쭉 타고 가다 보면 다음 역이 지금 SK 아파트 있는 쪽에 정거장이 있었어요. 옛날 동양화학선이라고 석탄 나르던 큰 기차들이 서는 역이 있었는데 그 역에서 논산 훈련소로 가는 군인들이 거기 모여서 기차를 타고 갔어요.

소집은 지금 얘기하면 공설 운동장이라 그래서 지금은 축구장인데 거기에서 모여서 다같이 걸어서 정거장까지 왔서 기차 타고 갔었어요. 아침에 공설운동장에 가면 중간에 점심 먹으라고 이만한 빵들 하나씩 주고 그랬어요. 우리는 짬빵이라고 불렀는데 입대를 앞두고 그 빵 먹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긴장이 돼서 그랬는지 맛이 없어서 그랬는지 남들 안 먹었는데 나는 악착같이 다 먹었어요.

수인선 협궤열차는 폭이 다른 기차 1/3만한 작은 열차인데 시골에서 채소라든가 아니면 소래 염전에서 소금 싣고 와서 팔고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기 동아아파트 저층쪽에 굴다리가 있는데 거기를 수인역 동네라고 불었어요. 그 앞에 지금도 잡곡 파는 데가 조금 있을 거예요, 아마.

그 협궤열차가 워낙 느렸어요. 조개고개라고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수인선 열차가 그때만 해도 증기기관이라 힘이 없어서 오르막에서는 거의 걸어가는 속도랑 같았어요. 그러면 앞에서 내려서 소변보고 뒤로 타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런 장난 하던 게 협궤열차의 추억 중의 제일 남는 추억이에요. 나중에는 다 디젤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사라지고 지하철로 바뀌었습니다.


Q.도시재생을 통해 동네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세요?

도시재생이 구도심을 살리는 개념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다른 동네처럼 벽화만 그리는 거보다는 이렇게 동네 역사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하는 활동들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수인선 인근은 예전부터 역사적인 흔적이 많은 곳이니 그쪽을 보존하면 용현동의 트레이드마크 가 될거 같아요. 지역을 보존하고 상징하는 것을 만드는 걸 재생사업에서 진행하면 상당히 좋아질 거라고 봐요.


Q.용현2동은 선생님께 어떤 동네인가요?

이 동네는 뭐든지 잘돼요. 사람도 잘되고 식물도 잘되고 하다못해 붕어까지 잘돼요. 우리가 이 집에 8명으로 들어와 살았는데 지금 다 모이면 41명이에요. 지금도 우리 집에는 4대가 모여서 살고 있어요.

이 동네는 싸움이 안 나요. 주차도 싸움도 나고 문제가 많다는데 우리는 안 그랬어요. 여기 우리 집도 옆에 빌라를 지을 때 땅 파고 뭐하면 집이 지진 난 거처럼 울렸어요. 그러다 마당에 콘크리트도 깨지니까 나중에는 공사하는 사람들이 와서 사과하며 다시 깔아줬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그 공사가 먹고사는 일이니 뭐라고 말 안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챙겨주니 고마웠어요. 그렇게 들썩였는데도 집이 문제가 없어서 더 신기했어요.

이상하게 우리 집이 인천하고는 인연을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나부터도 유치원에서부터 첫 직장까지 전부 인천이고 우리 자식들도 거의 다가 인천에서 학교를 나왔어요. 그래서 동네에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제는 여기 사는 게 당연하다 싶어요. 개인적으로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가족 간에 다복하게 잘 지냈으면 해요.



한명자 마을박물관 큐레이터




Q.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용현2동에 사는 한명자입니다. 여기 산지는 한 40년 되었어요. 그전에는 판잣집에서 살았는데 한해 한해 돈을 모아서 살기 좋다고 소문난 용현2동으로 이사했어요.


Q.예전 동네 풍경은 어땠나요?

예전에 터미널이 있을 때 새인천 예식장이 있었어요. 터미널 바로 위라서 사람들이 예식하러 많이 왔었어요. 또 저기 엑슬루타워 자리는 예전에 운전면허 학원이랑 시험장 같이 있었죠. 그리고 저기 철로변에 지금은 없지만 소금창고도 있었구요.

이런 동네에 몇년전부터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오면서 지금은 풍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 집도 주택이었는데 빌라업자들이 하도 팔라고 해서 그래서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왔어요.


Q.처음 사셨던 집이 기억나세요?

우리때는 그걸 금아주택이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남아 있어요. 예전에는 여기에 한 150세대 정도 똑같이 생긴 건물이 일렬 쭉 있었어요. 건물들에도 번호가 있어서 여기는 43호, 44호, 45호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까 찾기 쉬웠어요.

주택에 살 때 불편한게 좀 많았어요. 여기가 옛날에는 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고 동네에 물이 들어오는 일이 잦았어요. 비가 한번 오면 옛날에 저기 대성목재(지금의 유원아파트 자리)에서 나무토막이 막 떠내려와서 골목으로 그냥 막 들이쳤어요. 어마어마했어요. 지하실 다 차고 맨날 동사무소에서 양수기 빌려다가 물 퍼내고 어마어마했죠. 우리 또래들은 그거 하다가 다 골병들었어요.

그래도 애들 키우기 좋았어요. 골목에 차도 적고 한적해서 참 살기 좋았어요. 가족들이 모여서 옥상에서 막 고기도 구워 먹고 요즘이야 외식하지 예전에는 외식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옛날에는 진짜 그렇게 기분을 냈어요.

주택이 불편해도 마당이 있어서 좋았어요. 저는 애들을 여기서 다 키웠는데 예전엔 대야에 넣고 마당에서 수도 틀어놓고 수영장 대신으로다가 놀리기도 하고 목욕시키고 그랬어요.

아파트로 이사 가고 나서도 마당과 주택이 그리웠어요. 물론 자다가 연탄 안 갈아도 되고 따듯하고 시원하게 좋았지만 뭔가 마당이 없으니 답답하고 지나가던 이웃들 불러서 먹을 거 나누고 수다도 떨었던 기억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Q.이웃들은 어떤 분들이 많으셨나요?

여기 연안부두가 가깝잖아요. 거기서 일하는 항운노조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어부들도 있었고 인천항이 가까우니까 많이들 모여 살았어요. 지금도 항운노조 다니는 분들이 많이 살아요. 저기 인항고가 항운노조에서 세운 학교잖아요. 평택항으로 일이 빠지기 전에는 많이들 모여 살았어요.


Q.마을박물관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을박물관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어요. 동네 살면서 전혀 몰랐었어요.
토지금고에 대해서 전시도 하고 저기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교육도 해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한번 나도 호기심 나서 들어갔다가 우연히 같이 하게 됐습니다. 들어와서 교육을 들으며 시립박물관에 대해서도 좀 알게 되고 또 동네의 유능한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어요.


Q.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여기가 이젠 제2의 고향이에요. 생을 마칠 때까지 두루두루 동네에서 이웃들과 즐겁고 재미있게 살면 좋겠어요. 우리 마을박물관도 번창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이민재 마을박물관 큐레이터





Q.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용현2동에 자리한 토지금고 마을박물관 마을큐레이터 이민재입니다. 고향은 충청도 괴산인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서 인천에 살게 되었어요. 그게 한 30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남편이 인천 출신으로 토지금고에 살았었어요.


Q. 이사오셨을때는 어떠셨어요?

처음에 왔을 때는 번화한 곳이 아니었어요. 차 몇 대 정도 다니고 버스도 한 두 개 정도, 그 때는 전통시장도 아직 없었고 종합병원도 없어서 한적하니 시골의 읍내 정도 되는 마을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지금 한 30년 살다 보니까 굉장히 많은 발전을 했어요. 그리고 또 비룡공감2080 도시재생사업도 선정이 되었잖아요. 더 많은 발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Q .토지금고 마을박물관 활동을 하게 되신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예전에 토지금고 시장 상인회장을 했었어요. 한 5년 하면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고 마을 활동도 같이 하다 보니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마을박물관을 알게 되었어요.

토지금고 마을박물관 시작이 인천광역시립박물관하고 인천대학교가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인문도시 사업에 선정되어서 진행한걸로 알고 있어요. 처음 시작은 인천 시립박물관에서 저희 마을로 방문해 인문학 강의를 해주셨는데 강좌가 끝나고 나서 마을박물관을 세우게 됐어요. 한 15명 정도의 주민들이 교육을 통해서 마을박물관 큐레이터로 성장하였어요. 원래는 한시적으로 한두달 정도만 마을박물관을 운영하는 계획이었는데 끝날 무렵에 저희 15명이 회의를 했어요. 마을과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생겨 앞으로도 계속 마을박물관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미추홀구에 건의했고 그게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 오고 있어요.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이 처음에는 용정공원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미추홀 3단지가 들어서고 지금 자리로 이전했어요. 마을박물관이 매력적인게 시립박물관이나 구립박물관은 큰 단위잖아요. 그래서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요. 마을박물관은 우리 마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저희는 매년 1,2월에 기획 회의를 하고 3~5월간 집중적으로 유물도 수집하고 내용도 만들어요. 전시나 해설 모두 우리 마을큐레이터 선생님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전시의 레이아웃이나 제목, 글씨 하나, 사진 하나 다 저희가 선택해서 저희가 전시하고 해설을 해요. 미추홀구청과 인천시립박물관에서도 많이 도와주시는 덕분에 활동을 잘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Q . 토지금고라는 명칭이 용현동 보다 주민들에게는 더욱 익숙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택시를 타면 용현 2동, 용현 5동이라 말하면 모르는 분들도 토지금고라고 하면 알아들어요. 예전 염전을 토지금고에서 택지로 개발해 다시 개인이나 기업에 분양을 한 곳이지금 LH인 토지금고였거든요. 어르신들은 그 이름이 더 익숙하신 것 같아요.


Q . 동네에 추억이 있다면?

예전에 수인선 기차가 생각나요. 수인선에 저쪽에 연탄공장에 화물선들이 지나가곤 했어요. 그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도시안에 기차가 그렇게 도심을 통과해 다니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삼익아파트는 지금은 아파트도 많고 근처에 엑슬루타워가 올라가서 큰 게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래도 높은 건물이었고 진달래아파트도 그때는 깨끗하고 괜찮았었어요.

낙섬축제도 기억에 남아요 제가 왔을 때는 이미 낙섬은 없었지만 예전에는 염전도 있었고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섬이 하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미추홀구에서 낙섬을 기리기 위해서 축제를 1년에 한 번씩 마을 주민들이 주도해서 진행했어요. 주민들이 낙섬 축제를 주도했을 때는 용현여중 운동장에서 전도 부치고 국수도 해서 어르신들한테 대접도 하고 그러고 장기자랑도 하고 마을 대항으로 경기도 하고 체육대회도 하고 그랬어요. 최근에는 사스, 돼지열병, 코로나 등으로 2~3년은 축제를 못 했어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Q . 도시재생 사업에도 참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동네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꽃차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올해 비룡공감2080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에서 주민공모사업을 했는데 그때 꽃차를 같이 만들고 차를 마시면서 동네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제가 용현5동에 살지만 가끔은 근처에 사는 사람의 시각이도 필요한 것 같아요. 교통, 교육, 문화 다양한 이야기를 같이 나누는 기회였어요.


Q . 용현동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저도 30년을 살고도 이사할 생각이 없는 거 보면 이 동네가 일단 들어오면 나가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저만이 아니라 이 동네 사는 제가 알고 지내는 마을 활동을 하는 분들이나 그냥 알고 지내는 동네 분들도 특별하한 이유는 없어도 여기가 마음이 든대요.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신 분들이 많거든요. 이사 가셨던 분들도 다시 오셔요.

아니면 이사 가고도 생활은 여기서 하다가 그냥 출퇴근 하는거에요.

아이들도 유치원부터 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인하대학교까지 간다면 대학교 도 다 해결이 되잖아요. 마음적으로도 안정이 되는 그런 마을인가 봐요.

앞으로도 용현동이 더욱 살기좋은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